독립영화의 미래를 밝히다 서울독립영화제 2008
기사입력 2008-12-22 17:21
서울독립영화제2008이 9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19일 폐막했다. ‘상상력’을 전면에 내세운 이번 영화제는 그 모토처럼 양적인 성장보다 독립영화 특유의 빛깔을 되찾자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였다. 그런 의도가 적중한 것인지, 관객들의 반응도 좋아 영화제 기간 동안 박스오피스 10위(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 전산망 서울 기준)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독립영화만의 개성과 실험정신 충만한 작품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울독립영화제2008을 통해 올해 독립영화의 경향을 알아보고 화제가 됐던 네 편의 작품, <고갈> <3xFTM> <사람을 찾습니다> <스탑>의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소멸의 징후를 담다, <고갈>의 김곡 감독
HD | 컬러 | 128분 | 장편경쟁
메마른 벌판 위에서 남자(박지환)와 여자(장리우)가 만난다.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모텔로 향한다. 남자는 여자를 씻겨주고 나서 매매춘을 시작한다. 그것도 단돈 5만 원에.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여자는 남자와 싸우고 그의 곁을 떠나지만 다시 돌아온다. 서사적인 흐름은 있지만, 계속 반복되는 듯한 상황과 이미지로 하여금 관객을 심연에 빠트린다. 또 이 영화는 유두를 잘라내는 등의 충격적인 이미지부터 각종 괴이한 사운드와 설정이 담겨 실험영화의 느낌을 준다는 점이 특징이다.
FILM2.0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고갈>의 충격적인 장면을 못 이긴 관객 몇십 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해프닝이 화제였다. SIFF2008에선 그런 일은 없었나?
김곡 다행히 나가는 관객은 없더라.(웃음) 혹자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싫어하는 건 여자를 대상화하거나 여성이 남성의 폭력에 시달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표현하려는 게 아니었다. 극중에서 여자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른 채 관성적으로 관계를 지속하려고 안달복달한다. 그런 점에서 결국 칼자루를 쥔 건 여자라는 거지.
FILM2.0 <프롤레타리아의 기원>(2003) <빛과 계급>(2004) <정당정치의 역습>(2006) 등의 작품에서 당신은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비판했다. <고갈> 역시 ‘포주와 창녀’ 등의 설정에서 같은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김곡 물론 이 영화엔 남녀에 대한 성 정치학이나 문명과 산업의 대비 같은 게 담겨 있다. 하지만 극히 일부분이고 그건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난 상징보다 징후를 더 강하게 표현하려 했다. 상징이 현재와 연관된 것이라면, 징후는 미래나 감각과 관련된 것이다. 또 징후는 ‘앰비언스’(Ambiance)라 할 수 있다.
FILM2.0 다짜고짜 앰비언스라니, 좀 어렵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김곡 예전에 군산 새만금에 간 적이 있었다. 불도저로 밀었는지 맨땅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더라. 거기에 공간을 휘감고 있는 독특한 앰비언스가 있었다. 그게 계기가 돼 영화를 만들었다. 텅 빈 공간에 짓눌린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죽음의 독가스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죽음이나 소멸의 징후를 담고 싶었다. 롱숏을 쓰거나 8㎜ 카메라로 촬영한 이유도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FILM2.0 포커싱이 어긋나거나 괴이한 사운드와 과격한 이미지 등 실험적인 요소도 많은 것 같다.
김곡 배달원의 얼굴이 녹는 장면은 특수효과가 아니라 필름 표면의 감광 유제(Emulsion)를 녹인 것이다. 이렇듯 실험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꽤 있다. 앰비언스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실험영화의 성격을 가진 작품을 계속 찍고 싶다. 이시우 기자 | 사진 박태근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감수성 심어주기, <3xFTM>의 김일란 감독
DV | 컬러 | 115분 | 장편경쟁
<3xFTM>은 여성의 육체로 태어났지만 남성이길 바라는 FTM(Female To Male)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호르몬 치료와 외과적 수술을 통해 남성의 삶을 살고 있는 한무지, 고종우, 김명진(이상 가명) 세 명의 FTM 트랜스젠더들은 성 이분법으로 발생하는 사회의 차별과 억압에 노출돼 있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그들의 평범한 모습에 주목하려 한다. 속 깊은 친구의 비밀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FILM2.0 트랜스젠더 남성들에 관한 영화다. 출연자들이 신분 노출을 꺼렸을 법도 한데 어떻게 이 3명을 만났나?
김일란 성적 소수문화 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6년에 몇몇 인권단체, 개인 활동가들과 함께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약 30명 정도의 트랜스젠더 남성을 만났다. 조사를 하다 보니 이들의 삶과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를 기획하면서 화면에 얼굴을 노출할 수 있는 경우를 찾아봤는데 이 3명 외에는 불가능했다.
FILM2.0 그렇다면 출연자들은 스크린을 통해 커밍아웃 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김일란 어쩌면 영화보다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트랜스젠더들은 여러 가지 차별과 억압에 노출돼 있다. 관객이 영화를 통해 이들의 삶을 직접 보고 듣는 것은 세 명의 FTM 트랜스젠더가 커밍아웃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겠지만 출연자들의 정체성이 단편적인 소문이나 보도를 통해 아무렇게나 퍼져나간다면 그들의 삶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다. 관객에게 커밍아웃과 아웃팅(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노출하는 것)에 관련한 감수성을 심어주는 것도 영화의 상영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FILM2.0 아웃팅에 관련해서 특별히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나?
김일란 상영과 병행해 토론회나 포럼 등의 문화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내년 2월부터는 커밍아웃 가이드북을 만들어 상영회를 중심으로 무료 배포할 예정이다.
FILM2.0 영화의 성과를 어떻게 생각하나?
김일란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관객은 주인공 세 명이었다. 모두들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서 긍정적인 변화를 느낄 때에는 이런 식으로 사회가 변하리라는 희망을 본다면서 만족스러워하더라. 다른 출연자들과 정체성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던 김명진은 영화를 통해 다른 FTM 트랜스젠더들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해 뿌듯하기도 했다.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무지는 이 영화가 앞으로 자신을 계속 따라다닐 생각을 하면 무섭다고 했다. 영화 속의 모습만 계속 기억될까 부담스러운 것 같다. 김명진은 여드름이 너무 많이 나왔다고 속상해하더라.(웃음) 유주하 기자 | 사진 이종철
독립영화의 선입견을 깬 작업, <사람을 찾습니다> 이서 감독
HD | 컬러 | 95분 | 장편경쟁
<사람을 찾습니다>는 동네에서 개들이 차례로 없어지는 사건에 스릴러 장르의 기본 틀을 사용했다. 원영(최명수)은 돈이면 뭐든지 가능하다고 믿는 부동산업자. 그는 지능이 모자란 규남(김규남)을 개처럼 학대하고 정부와 격렬한 섹스를 통해 쾌락을 즐긴다. 한편 사라진 개들에 이어 동네 사람들과 원영의 정부가 실종되자 규남을 의심한 원영은 그의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사건의 범인을 파헤치는 과정을 통해 현대 사회의 모순과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FILM2.0 독립영화에서 스릴러 장르를 시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이서 원래부터 사건의 낙차가 큰 호러나 스릴러 장르에 매력을 느껴왔다. 관객들로 하여금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힘에 끌린다.
FILM2.0 배경으로 북한산이 등장한다는 점도 독특하다.
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북한산은 나에게 꼭 한 번 카메라에 담고 싶은 공간이었다. 으스스한 겨울 산의 정취나 삭막한 분위기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삭막함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공간에 사람에 대한 철학,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결부시켜 살을 조금씩 더하니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FILM2.0 속도감 있는 화면 전개, 감각적인 사운드 등 상업적인 요소들이 돋보인다.
이서 독립영화 하면 떠오르는 무겁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극의 진행 속도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컷을 많이 나누었는데 그러다 보니 예산이 점점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는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웃음) 음악은 우울하고 어두운 톤으로 스릴러물의 스산한 분위기를 살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작업했다.
FILM2.0 주인공 규남은 지적장애인으로 등장하고, 원영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로 그려지는 등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다.
이서 일단은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극영화에서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만 주인공을 맡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규남은 실제로도 지적장애인인데 대학로에서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원영의 캐릭터는 주변에서 영감을 얻었다.(웃음) 완벽히 악한 사람이나 반대로 선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중성을 가지고 있고 특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원영과 같은 속물적인 성향은 누구에게나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성향이 어떤 계기로 인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FILM2.0 내년에 정식으로 개봉한다고 하던데?
이서 내년 3월쯤 극장에 걸릴 예정이다. 그때 수익이 나면 영화를 찍으면서 무료 봉사했던 스탭들에게 수익금도 돌려줘야지. 이미 계약서도 다 받아놨다.(웃음) 조숙현 기자 | 사진 석지욱
사람 냄새 나는 애니메이션, <스탑> 박재옥 감독
35㎜ | 흑백 | 5분 | 단편경쟁
<스탑>은 한국형 히어로 무비다. 주인공 영석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년 남자. 그는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순간 우연히 자신에게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영석이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탄 차는 다리 밑으로 떨어진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영석은 죽음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무거운 몸을 날린다. 주인공의 지극한 효심이 주는 감동은 물론이고 다양한 카메라 각도와 연출 기법이 보는 쾌감도 선사하는 작품이다.
FILM2.0 SIFF2008에서 <스탑>은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또 61회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에서는 3위로 입상하기도 했다.
박재옥 외국 관객들이 한국적인 정서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잘 이해하더라. 코믹한 장면에서도 많이 웃고,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상을 탄 것보다 내 작품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덕분에 해외에도 놀러 가고.(웃음)
FILM2.0 <스탑>에서 주인공 영석은 교통사고가 난 후 자신에게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이 있단 걸 발견한다. 이런 독특한 설정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박재옥 어느 날, 교통사고가 나서 눈앞에 불똥이 튀는데 그 순간 시간이 멈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장면이 계기가 돼 이후 중년 남자가 어머니를 구출하는 내용까지 이르렀다.
FILM2.0 색칠도 없이 100% 연필만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박재옥 3D든 2D 애니메이션이든 따뜻한 느낌이 나는 걸 좋아한다. <스탑>은 한국영화아카데미 24기 졸업작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몇 명이 도와주긴 했지만 대부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만 했다. 제작비나 시간 면에서 빠듯했다. 좀 빨리 만드는 방법이 없을까 하던 차에 ‘연필로 그리면 금방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FILM2.0 연필로만 그린 작품이라 단순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막상 보니 핸드헬드나 플래시백 등 다양한 기법을 차용하는 등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재옥 아무래도 교통사고 후 주인공이 어머니를 구출한다는 점에서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영화에서 쓰는 여러 가지 연출 기법도 넣고, 음향 전문가도 불러 차량이 부딪치는 소리 등을 리얼하게 표현하려 했다. 플래시백 장면은 감동을 주는 장치로 쓴 것이지만 배경을 바닷가로 한 건 영석이 헤엄을 잘 치는 인물이라는 걸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또 영화적인 기법 말고도 애니메이션에서만 가능한 설정도 넣었다. 예를 들면, 영석이 어머니를 구하겠다고 결심한 후 달리는 장면에서 배경 없이 주변을 선으로만 그린 것 등이다. 이시우 기자